기능해부학(functional anatomy)을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근육움직임(muscle movement) 접근법
김형욱의 칼럼언어
생각해보니 해부학(anatomy)에 '말랑말랑'이라는 표현을 쓴 지도 참 오래되었습니다.
처음 해부학(anatomy)을 접하게 됐을 때, 그 시작점에서 누구보다 많은 어려움과 시간을 겪었기에, 오래전 제 머릿속에 해부학(anatomy)이라는 학문은 아주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몸의 이야기 정도로만 여겨졌습니다. 그렇다 보니 알아도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할수록 알 수 없으니 답답함과 막막함이 저를 지배할 수밖에요. 하지만 어느 순간, 번쩍이는 깨달음을 얻었다고나 표현할까요. 저는 그때부터 해부학(anatomy)이라는 학문에 대한 관점이 새롭게 변해갔습니다.
그 이후 사람들 앞에서 해부학(anatomy)을 소개하기 시작해나갔고, 제가 가진 직업을 대상으로 또 다른 일들이 펼쳐졌으며, 그 일들은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저는 해부학(anatomy)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바로 '말랑말랑'하다고요.
운동지도자들이 배우려는 기능해부학(functional anatomy)은 구조해부학(structural anatomy)으로부터 비롯됩니다. 본래 해부학(anatomy) 자체는 '인체의 관찰'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해부학(anatomy)에서 파생되고 분류된 수많은 학문들은 구조로부터 연구되고 발달된 해부학(anatomy)입니다. 이 사실은 기능해부학(functional anatomy)을 익히는 데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사실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기능(function)을 알기 위해서, 왜 구조(structure)를 먼저 이해해야 하는지는 이미 해부학(anatomy)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으니까요.
근육움직임(muscle movement)을 학습하기 위한 기능해부학(anatomy)이 어려운 이유는, 구조로부터 비롯되는 근원적인 사고방식이 함유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요인입니다. 앞서 밝혔던 것처럼 해부학(anatomy)의 역사와 더불어, 기능(function)은 구조(structure)를 기반으로 발휘됩니다. 그러니 구조(structure)로부터 비롯되는 근원적인 사고방식을 체득한다면, 기능적인 사항(function)들은 저절로 따라오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기능(function)을 먼저 익히려 한다면, 구조(structure)가 부재된 상황에서 이야기되기 때문에 기능(function) 그 자체의 기능(function)을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게다가 이러한 접근법은 구조(structure)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가령 특정한 물건을 만든다고 가정했을 때, 목적을 가지고 그 물건을 목적에 맞게 만든 뒤 사용하는 것과, 목적 없이 만들어진 물건을 가지고 물건이 사용되는 목적에 따라서 목적이 더해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능(function)을 접근하기 전에, 더 근본적인 목적성을 지니고 있는 구조(structure)를 먼저 접근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몸을 담고 있는 해부학(anatomy)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으로 집착이라는 말을 좋아하진 않지만 기능해부학(functional anatomy)을 잘 알기 위해서는 어떡해서든 구조(structure)를 보다, 먼저, 항상 집착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능해부학(functional anatomy)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주는 가장 큰 영향이 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요소로 '구조(structure)에 대한 선행된 이해'를 꼽았지만, 그다음 요소에도, 그리고 그다음 요소에도 언제는 구조(structure)는 내재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기능(function) 이전에 구조(structure)에 대한 사유를 언제나 마음 깊이 담아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든 요인들이 더해졌을 때, 그 요인들끼리 개연성이 연이어져 해부학(anatomy)이 말랑말랑하게 여겨지게 됩니다.
기능해부학(functional anatomy)을 현장에서 지도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부분 중 하나는 '생소한 개념'입니다. 생소한 개념 모두는 해부학(anatomy)에서 비롯되었으니, 다시 말하자면 해부학(anatomy)이 생소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당연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해부학(anatomy)을 배워본 적이 없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몸과 운동과 식이에는 관심이 많지만, 이 모든 것을 학문적으로 정립한 해부학(anatomy)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배워본 적도, 관심도 없으니 당연히 생소할 수밖에요.
하지만 정식으로 배우진 않았지만, 이미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동안 사회적으로 습득한 상식에 의합니다. 정식으로 배우지만 않았을 뿐, 이미 사회적으로 널리 쓰던 언어와 표현, 습관, 문화 등에 녹아있습니다. 그러니 생소하게만 여겨지는 학문에, 정식으로 배우는 것처럼 배움을 시작하지 않아야 합니다. 배움에 있어, 이미 알고 있는 상식들을 활용하여 기능해부학(functional anatomy)을 상식처럼 이해하면 됩니다.
그것이 해부학(anatomy)을 담고 있는 전문 용어가 됐든, 근육이름(muscle name)이 됐든, 근육움직임(muscle movement)이 됐든 상관없습니다. 모든 해부학(anatomy) 정보들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들을 이용하면 될 뿐입니다.
그렇다 보니 알면 알수록 새로움이 아니라 익숙함의 감정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지금까지 습득했던, 누구나 알고 있는 사회적인 상식들로 배워가는 해부학(anatomy)은 전혀 새로움이 아닌 익숙함의 연속입니다. 게다가 그동안 우리는 몸을 가진 채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지금 가진 몸을 가지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몸은, 곧 나와 같습니다. 그러니 배울수록 어찌 익숙하지 않을 수 있나요. 그러니 배울수록 어찌 감정이입이 되지 않을 수 있나요.
하나의 언어에는 그 언어가 담고 있는 역사, 경험, 고민, 감정과 같은 수많은 흔적들이 담겨있습니다. '바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와 '오늘'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두 단어가 의미하는 바도 다르지만 느껴지는 바도 다릅니다. 이것은 해부학(anatomy)에서도, 그리고 어느 학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이라는 단어가 처음부터 오늘로 불려지고 오늘을 의미하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기능해부학(functional anatomy)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용어들도 처음부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그 단어가 그 의미로 지속되고 있는 것은 그만의 흔적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왜 하필 '오늘'이라고 할까요. 해부학(anatomy)을 왜 하필 '해부학(anatomy)'이라고 할까요. 마치 나의 이름이, 곧 나의 존재와 동일시되는 존재로 여겨지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의 것들은 그만의 존재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면, 전문적으로만 여겨지는 언어에 대해서 흔들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그 언어의 역사를 통틀어서 함축적으로 배울 수 있으니까요.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단어들과, 사전에 등장하는 모든 단어들과, 그리고 해부학(anatomy)에 서술되는 모든 단어들 전부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수많은 고민을 통해 나의 이름을 지어주셨던 부모님의 마음처럼.
모든 언어의 탄생 이전에는 우리의 부모님과 같은 역할을 했던 사람들에 의해 언어가 탄생된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더욱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름을 붙여졌다는 자체에, 그 대상에 대한 관심과 몰입을 이미 담고 있으니까요.
기능해부학(functional anatomy)을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근육움직임(muscle movement) 접근법에 대해서, 교육자로써 특별한 방법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특별한 방법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들에 의해서 비롯됩니다. 해부학(anatomy)이며, 생리학(physiology)이며, 천문학(astronomy)이며, 물리학(physics)이며. 세상의 모든 학문은, 학문을 알기 위해 학문이 생성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사람을 포함한 자연의 관심에서 앎으로 이어져 생성된 학문입니다.
이제 저의 이야기가 조금은 전해지셨나요. 왜 기능(function)이 먼저가 아니라 관찰로부터 출발한 구조(structure)를 계속해서 집착하라고 하는지, 왜 새로움이 아닌 상식으로 접근하여 익숙함에 감정이입되는지, 왜 또 다른 시공간에서 부모님과 같은 존재가 다른 대상의 존재를 특정한 언어로 표현하려 했는지를 말입니다. 그리고 왜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 이미 사람을 표현하고 있는 해부학(anatomy)이 말랑말랑해지는지를 말입니다.
부디, 해부학(anatomy)을 공부함에 있어 저의 강렬한 메시지를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김형욱이 읽어주는 '기능해부학(functional anatomy)을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근육움직임(muscle movement) 접근법'
특정한 활동을 하는 데에 있어 단순한 스킬은 그것을 잘할 수 있게 만들어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의 의미는 행위 자체에 그칩니다.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부를 때, 내 이름을 어떤 감정으로 불리는지에 따라 나의 감정까지 변화하는 것처럼. 하나의 학문에 대해서도, 자그마한 배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부학(anatomy)에도 이미 수많은 감정이 담겨있으며, 그 감정은 감정으로 대할 때에만 동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만약 그동안 살아온 삶의 모든 감정으로 해부학(anatomy)을 대한다면, 해부학(anatomy)도 그만큼 감정을 내비칠 것입니다. 감정의 연장선인 몰입으로 가기 위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우리가 깃든 몸에 대한 순수한 관심과 의문이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