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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 symbol/하늘의 상징 천문

서양 천문학 발전사

soma-harmony 2021. 1. 13. 16:44

고대 천문학사

 

 

고대 과학의 발전은 생존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경험적 가치관에서 비롯되었다. 고대 문명은 주로 큰 강 주변에서 농경 사회를 이루면서 발전했기 때문에 고대인들은 농업과 관계 깊은 계절에 관한 지식의 중요성을 깨닫고 천문 관측을 시작하게 되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신화적인 우주 생성론과 생활의 경험에서 유추한 우주관이 일찍부터 발달해 있었다. 오늘날 과학적 견지에서 보면 비합리적인 경향이 있지만 거대한 우주를 하나의 관점에서 바라보려고 한 점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농경 사회였던 이집트에서는 천체 관측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지구의 적도를 둘러싼 넓은 띠 부분에 존재하는 많은 천체들을 36등분 하였고, 이것과는 별도로 황도에 딸린 별들을 다시 12등분하였는데 이것은 태양과 항성의 상호 위치를 알고 계절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집트 인들은 항성을 관측한 결과를 피라미드의 구조를 설계하거나 역법의 체계를 만드는 데 응용하였다고 전해진다. 피라미드 밑면의 4개의 변이 정확히 사방을 향하고 있고, 대개 태음력을 사용하는 고대의 역법과 달리 태양력을 사용하는 이집트의 역법이 그 증거다.

 

 

나일강 유역에서 이집트 문명이 발달한 시기와 거의 같은 시기에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델타 지역에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달하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인은 초기 문명 중에서 가장 먼저 별과 행성을 적극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고, 하늘의 지도도 최초로 작성했다. 그들은 주로 그 당시 잘 알려져 있던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과 같은 행성을 오랜 기간에 걸쳐 관측하였고 그 결과, 각 행성들은 천구의 어느 일정한 띠 속에서 각기 독자적인 궤도와 주기로 운동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때 행성들 이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천구의 일정한 띠를 수대라 하는데 이는 황도의 남북 방향으로 각각 약 8° 정도 너비를 가진 띠 모양의 구역을 말한다. 메소포타미아인은 이 수대를 12등분하여 각각의 구역을 궁이라 불렀는데 이는 위에서 언급한 이집트인들이 황도를 12등분한 것과 서로 통하는 것으로 지금까지도 황도 12궁으로 전해진다. 이와 같이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행성 운동에 관한 천문 관측이 가장 정밀하게 이루어졌는데 이는 달력 제작 과 같은 생활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인은 700여 년에 걸친 달 관측 결과를 토대로 달이 가득 찰 때와 차지 않을 때를 기준으로 태음력을 고안하여 오랫동안 사용하였고 태음력을 사용했을 때 실제 1년 사이의 기간을 조정하는 데 문제가 발생하자 윤년을 삽입하여 조절하는 지혜를 발 휘하였다. 1주일을 7일, 1일을 24시간, 1시간을 60분, 1분을 60초로 나눈 것도 그들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이 관측한 행성의 운행과 달과 태양에 대한 관측 기록 등은 단지 별만이 아닌 모든 천체와 현상을 포함해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을 지배하는 법칙을 설명하려는 포괄적인 의미를 지녔던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천문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과학적 사고’라 부르는 사고 방법은 그리스 시대에 위와 같은 관점으로 우주를 바라 봄으로써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전의 나일 문명이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점성술이나 역법을 정립하는데 천문 관측을 사용하는 것에서 일진보하여 오늘날의 터키 해안에 위치 한 도시 국가 밀레토스에서 최초로 신화나 종교가 아닌 이성으로 우주를 이 해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등장하였다. 이는 당시로는 아주 혁명적인 생각이었고 탈레스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탈레스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아낙시만드로스는 초기의 해시계를 만들었고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최초의 과학책을 저술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하늘에도 관심을 돌려 최초의 천문 학자로 일컬어지며 지구의 모양은 원통형이고 우주 공간에 자유롭게 떠있으며,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다고 믿었다. 이후 등장한 아닉시메네스는 지구의 모양의 편평한 원반이라고 주장하였는데 비록 이들의 주장은 틀린 것이 많기는 했지만 모든 천문 현상의 원인을 신화나 종교에 근거하여 설명 하던 기존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자연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이 있음을 인정 하였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Astronomy(천문학)의 어원은 ‘별’을 뜻하는 그리스어 astron과 ‘법’을 뜻 하는 nomos가 합쳐진 것으로 그리스 시대에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어원 에서도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천문학이 우주 만물의 법칙을 설명하려는 학문 이었음이 확인된다. 기존의 자연 철학자들이 사물을 이루는 근본 물질에 대 한 탐구에서 그것을 우주 범위로 확장했던 것과 달리 세상과 모든 자연을 수로써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피타고라스는 사물을 이루는 근본 물질이 아니라 우주에 내재한다고 생각되는 질서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고, 질서 정연하고 조화로운 우주를 kosmos라고 명했다(이는 오늘날 우주를 뜻하는 cosmos의 어원이 되었다). 표면상의 모든 점이 중심에서 똑같은 거리에 있는 원을 완전한 도형으로 여긴 피타고라스의 개념은 그 후 오랫동안 후세에 영향을 미쳐 행성들과 그 밖의 천체들이 구형의 지구 주위를 완전한 원을 그리며 돈다는 천동설의 기초 개념을 형성하게 된다.

 

B.C. 340년 경 피타고라스의 개념을 받아들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하였으며 지구는 거대한 천구의 중심에서 움직이지 않고 그 주위를 달과 태양을 비롯해 다른 행성들이 원을 그리며 돈다고 믿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대부분 상식적인 관찰에 의존한 것이어서 그만큼 설득력이 있었으며 또한 체계적이었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그 의 사후 1000년 이상 동안 과학계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는 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닌 태양이라는 가정 하에 지구는 매일 한 번씩 자전하면서 일 년에 한번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후에 등장하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매우 흡사하여 아리스타르코스를 고대의 코페르니쿠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최초로 삼각 측량법을 이용하여 지구와 달, 태양의 상대적 크기와 거리를 측정하는 등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였으나 그 당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 중심설이었으므로 그가 주장한 태양 중심설은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뒤를 이어 지구 중심 체계를 더욱 발전시킨 천문학자인 히파르코스는 천문학의 아버지라 고대 세계 최고의 천문학자로 간주된다. 지구에서 벗어난 점을 중심으로 하는 고정된 이심원의 궤도로 태양의 운동을, 움직이는 이심원의 궤도로 달의 운동을, 주전원의 운동으로 행성의 운동의 불규칙성을 설명하였다. 이외에도 히파르코스는 고대 관측 기록을 대조, 종합하여 1000여개의 별들을 관측한 뒤 위치를 정확히 표시하였으며 별들의 밝기를 6등급으로 분류하였는데 그 가 분류한 별의 밝기 등급은 오늘날까지도 쓰이고 있다. 이와 같이 히파르코스는 천체 운동에 관한 이론 외에도 천체 관측과 측정에 있어 방대한 자료를 남김으로써 천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이 역사상 전례가 없는 동, 서양을 합친 대제국을 건설하였던 헬레니즘 시대에는 그리스의 과학과 바빌로니아(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이어지던 지역)의 과학이 합쳐지면서 발전하게 되었다. 즉, 그리스 천문학과 바빌로니아의 천문학 역시 자연스럽게 융합되어 메소포아미아 문명이 발달 했던 시절부터 이어져 오던 천문 관측 기록 자료들이 그리스 천문학에서도 사용되면서 계속 발전하게 된 것이다.

 

갠지스 강 유역에서 발달한 고대 인도 문명은 자연 현상을 신으로 보는 다신교적 경향이 두드러졌으며 남아 있는 기록으로 살펴보건대 달, 별, 태양 등에 대한 숭배를 찾아볼 수 있으나 행성의 존재에 대한 것은 없는 것으로 보아 천문 관측이 크게 발전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애초에 서방에서 넘어온 천문학이 인도인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과학적인 이유가 아니라 점성술 때문이었다는 사실도 한 가지 이유다. 그래서 천문학자들에 의해 일찍부터 부정되어 온 ‘땅이 편평하다’라는 생각은 고대 인도에서 여전히 팽배했었다. 시간적인 면에서 우주는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한다는 고대 인 도의 우주관은 고대의 다른 어느 문명과 비교해도 그 스케일 면에서 뒤짐이 없지만 독자적으로 발전한 다른 문명과는 달리 고대의 인도 문명은 바빌로니아나 그리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는 인도의 과학이 서양의 과학과 유기적으로 발달해 왔음을 의미하며 인도 과학은 여러 경로를 통해 중국으로, 그리고 이어서 우리나라로 들어왔기 때문에 비단 천문학뿐만이 아니라 전반에 걸쳐 인도 과학은 동서양 과학 교류의 역할을 했다는데 큰 의미를 가진다.

 

 

이슬람의 천문학 역시 고대 인도의 천문학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과학을 중심으로 페르시아의 사산조나 인도의 과학이 이입되고 합성되어 성립된 것 이었다. 인도의 천문표, 페르시아의 천문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체계 (Almagest)와 같은 저술들이 번역되어 소개되었고 천문대에서 천문 관측이 활발히 행하여졌다. 천문표는 천체의 운동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하였지만 당시 이슬람의 통치자인 칼리프는 자신의 이름을 붙인 천문표를 남기고자 하여 천문대에서는 천문표의 제작도 함께 이루어졌다. 이는 그 당시 천문학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슬람의 천문학자 알파르가니의 저서 ‘천체 운동 의서’는 12세기에 번역되어 중세 서구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슬람 최대의 천문학자라 일컬어지는 알밧타니는 계속적인 관측을 통해 황도 경사치, 회귀년의 길이 등을 상세히 측정하였고 성표를 만들었다. 이슬람의 천문학은 우주관이나 혹성 운동론의 진보라는 면에서 보면 뛰어난 공헌은 없었으나, 천문 계산법 분야에서는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이슬람의 천문학은 십자군 전쟁, 시칠리아, 스페인을 매개로 하여 서구로 전파되었는데 이는 이슬람 서적을 번역하여 소개되는 방식으로 주로 이루어졌다. 천문학을 포함한 이슬람의 문명 및 과학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 눈부시게 발달한 문화 및 과학 유산과 이슬람에서 이루어진 성 과를 서구 유럽에 전하여 이후의 과학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중국 과의 과학 기술 교류를 통해 전해진 중국의 제지술과 직물 기술 등을 유럽 에 전하는 등 이슬람 세계는 동서양 간의 과학 교류에 이바지한 고대 인도 문명과 같이 중국과 유럽을 잇는 문화적 중개지 역할을 하였다. 중국이 몽골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슬람 세계와 중국의 교류는 더욱 활발해지기 시작 했고 페르시아에 일한국을 세운 후라구는 당시 유명한 페르시아인 천문학자 나앗딘에게 천문대를 건설케 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천문대였다. 이슬람의 천문학은 원래 그리스 천문학을 받아들인 것으로 중 국의 전통과는 다른 방법으로 천체의 위치나 일월식의 예보를 할 수 있었다. 정밀도에 있어서 중국의 방법과 큰 차이는 없었으나 중국의 방법이 지닌 결점을 보충할 수 있어서 당시 높은 평가를 얻었다. 이후 중국에서도 회회사천대라 불리는 천문대가 세워져 이슬람 방식으로 천문 관측 및 역법 계 산이 행하여졌다. 이렇게 얻은 천문 수치를 기초로 수시력이라는 역법을 만들었는데 수시력에 사용된 1년의 길이는 그레고리력과 같은 365.2425일로 매우 정확하였다. 수시력은 이후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큰 영향을 미친다.

 

중세 천문학사

 

 

고대 서양에서는 자연에 대한 이론적 인식이 큰 진전을 보인 반면 중세 시대에는 중세 사회를 지배한 기독교에 눌려 이론적인 과학의 발전보다 실용적인 기술에서 큰 발전이 이루어진다. 시계, 나침반, 화약 등이 개발되었고 중국에서 전해진 제지술과 인쇄술 등은 과학 기술 분야의 경험적 지식이 축적되는 것을 가능케 하여 후에 과학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밑바탕을 제공하였다. 이슬람 문화권과의 접촉은 중세 유럽인들에게 종교로 인해 억눌렸던 과학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이슬람에서 출간된 과학 서 적들을 번역하여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지속되었고 이러한 노력들은 유럽인들이 고대 그리스의 과학 전통을 이을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시장 경제가 발달하고 실용적인 과학 기술이 발달했던 중세 시대에 실험 과 수학과 같은 합리적인 방법이 새로운 자연 과학 연구 방법으로 각광받기 시작할 무렵 문예 부흥 운동과 종교 개혁이 일어났다. 이는 사회 전반에 걸 쳐 큰 영향을 미쳐서 중세 시대에 억눌려 있었던 그리스 사상을 되살림으로 써 자연 과학 발달의 토대를 다지게 했다. 특히 이 시대의 유명한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여러 예술 분야에 걸쳐 훌륭한 작품들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자연 과학과 기술 전 반에 걸쳐서도 업적을 남겼는데 그만의 독창적인 연구 방법은 후에 이어지는 갈릴레이 과학 혁명의 기반을 닦는 역할을 하게 된다. 다빈치는 생물 학, 과학, 역학 등과 같이 자연 과학 거의 전 영역에 걸쳐 연구를 하였는데 다빈치가 전 생애를 통해 연구한 자연 연구의 최종적인 종합 산물은 우주론이었다. 그의 우주론은 통칭 ‘눈에 보이는 우주론‘이라 일컬어지며 예술가였던 그의 특성이 그대로 반영되어 자연 전반에 관한 관찰, 실험, 성찰을 통해 얻어진 모든 인식의 종합적 통일에 이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슬람 문화와의 접촉으로 시작된 유럽인들의 전반적인 세계관 변화가 16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일어나면서 자연에 대한 사고방식의 변화가 두드러지게 일어났고, 이를 후세 사람들은 과학 혁명이라고 부르게 된다.

 

 

 

코페르니쿠스는 중세 시대에 부활한 그리스 사상의 신비주의의 영향으로 태양 중심설의 영감을 떠올리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저서에서 지구는 다른 행성과 마찬가지로 태양 주위를 회전하며, 지구는 하루에 한 번 자신의 축을 중심으로 자전하며, 달은 지구 주위를 회전하며, 항성 천구는 회전하지 않으며 행성구보다 태양에서 훨씬 멀리 떨어져 있다는 명제 등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타르코스가 이미 제안한 바 있는 것으로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시대의 분위기를 생각해볼 때 코페르니쿠스의 이러한 생각은 상당히 대담하고 혁명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지구를 움직이게 함으로써 1000년 이상 유럽을 지배해온 아리스 토텔레스적 세계관에 타격을 입힌 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충분한 것으로 평 가받고 있다. 확실히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은 기존의 가치관을 허물만한 요 소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 당시의 기준으로는 새롭지도, 합리적인 것도 아니 어서 다음 세대의 천문학자인 브라헤는 코페르니쿠스 학설에서 오히려 후 퇴, 수정 천동설을 제창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브라헤의 체계는 코페르니쿠스보다 덜 파괴적이어서 교회의 옹호를 받았고 이는 중국으로 건너간 선교사들에 의해 동양, 우리나라에까지 전파가 되었으므로 우리나라 천문학사에 는 큰 의미를 가진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를 움직이게 함으로써 아리스토 텔레스적 세계관에 타격을 입혔다면 브라헤는 천체를 관측하여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관에 타격을 입혔다. 그가 지속적인 관측을 통해 밝혀낸 혜성의 궤도와 신성의 발견은 아무것도 새로 생겨나거나 없어질 수 없다고 강조해 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과는 상충되는 것이었다. 브라헤의 정밀한 천체 관측 자료를 넘겨받은 케플러는 1609년 발간된 그의 저서 ‘신천문학’에서 ‘타원 궤도의 법칙’과 ‘면적 속도의 법칙’을 발표함으로써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인 ‘원궤도’마저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천체의 운동을 단순한 기하학적 도형에 의해 정의하려는 고대 그리스 이래 계속되었던 천체 운동학의 과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한 기념비적인 업적 이었다. 10년 뒤 케플러는 행성의 공전 주기 제곱이 태양과 행성 간 평균 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조화의 법칙을 발표하였다. 수 신비주의에 심 취해 있었던 케플러가 자신의 손으로 원 궤도를 무너뜨렸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천문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세계의 완전한 몰락은 갈릴레이에 의해 이루어졌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사용하여 목성의 위성을 발견하였는데 이는 목성에 천구가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었고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이 틀렸음을 증빙하는 것이었다. 갈릴레이의 체계에서는 물리학과 천문학이 별 개의 학문이 아니라 하나의 학문이었고 우주는 각각의 공간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동질적인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 존재였다.

 

코페르니쿠스가 종래의 태양 중심 구조를 뒤엎는 지구 중심 구조를 제안하면서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과학자 들은 이에 부응, 기존 역학 이론이 전면적으로 수정되게 된다. 이때 놀라운 업적을 남긴 과학자로는 갈릴레오, 뉴턴, 데카르트 등이 있다. 이렇듯 중세 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시대에는 과학에 대한 긍정적 사고 및 전망과 거기에 서 파생된 풍성한 과학적 성과가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과학의 모든 분야에 걸쳐 비약적 발전이 일어날 수 있었고 최종적으로 과거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지식 체계가 자리 잡게 되었다.

 

근대 천문학사

 

 

16세기 이후 시작된 과학 혁명으로 과거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지 식 체계가 확고히 자리 잡게 된 18, 19세기는 과학이 크게 발전한 시기였다. 사람의 필요에 의해 수학과 더불어 자연과학 중 가장 일찍 시작된 천 문학 분야는 처음에는 종교나 신앙의 색채를 짙게 띠었으나 중세 이후 여러 천문 현상에 대한 지식이 축적됨과 동시에 망원경이 만들어지고 특히 과학 혁명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한 역학이 천체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게 됨으로써 행성을 새로이 발견하거나 태양계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등 보다 과학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역학에 바탕을 둔 천문학을 눈부시게 발전시킨 사람은 라플라스였다. 그 는 행성의 궤도가 섭동으로 인해 서서히 변화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심률과 경사는 거의 변하지 않고, 또 행성의 평균 거리도 불변하며 다만 미소한 주기의 변화만 일어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보데가 발견한 보데 법칙에 의해 소행성의 위치가 예측되었고 이후 이탈리아의 피아치가 예측된 위치에서 소행성을 발견하였다. 또한 허셜은 이중 성을 관측하여 태양계의 운동을 지배하는 역학 법칙이 멀리 떨어진 별의 세계에서도 적용되고 있음을 증명하였다. 이와 같이 17, 18세기에는 주로 망원경을 사용한 관측에 의해 천문학이 발달하였고 19세기 후반에는 사진술과 분광학의 발달로 천문학사상 새로운 분야인 천체물리학이 등장, 크게 발달하였다. 특히 별의 분광학적 특징을 연구하여 그 결과를 토대로 한 항성의 분류는 별의 표면 온도와 관계가 있고 이것은 별의 진화와 관계가 있으므로 별의 진화 과정을 연구하는 큰 단서가 되었다. 이렇듯 분광학 발달로 인한 스펙트럼 분석, 사진술의 발달, 관측 기계의 정밀화, 새로운 연구 방법론, 역학과 같은 여러 과학의 보조에 의해 19세기 천문학은 착실히 발전의 토대를 쌓았고 20세기에 천문학이 눈부시게 발달할 수 있는 기초를 다졌다.

 

근대 시대의 천문학에서 주로 논의되었던 것 중의 하나는 대우주의 발견 이었다. 태양계 너머 은하계, 그리고 은하계 너머의 대우주를 연구하기 위 해서는 항성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100광년 이내의 거 리에 있는 항성의 경우 연주 시차의 측정으로 거리를 구할 수 있었으나 더 멀리 있는 항성의 경우에는 이런 방법을 적용할 수 없어 거리를 구할 수 없 었다. 그 후 광도는 일정치 않으나 주기적으로 변하는 많은 별 중에서 세페우스형 변광성의 변광 주기와 절대 광도 사이에는 일정한 관계가 있음을 알 게 되었다. 연구를 계속한 결과 광도는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 어두워짐을 알게 되었고 이것으로 100광년보다 멀리 있는 항성의 거리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역학적 천문학 분야에서 눈부시게 활동했던 라플라스는 1976년 신성운설을 발표하였다.

 

" 태양계는 천천히 자전하고 있는 고온의 기체 덩어리로부터 출발한다. 태양계의 원시 상태는 성운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원시 성운은 냉각되어 수축되지만 성 운이 지니고 있던 원래의 각 운동량의 총화는 불변하므로, 수축하면 할수록 자전의 속도가 빨라지게 된다. 적도면 부분에는 원심력이 점점 크게 작용하게 되어 중력과 원심력이 같아질 수 있다. 이때 적도 부분에서 물질이 고리 모양으로 분리되어 수 축한 것이 각개의 행성이고, 그 행성의 자전에 의해서 또 다시 위성들이 분리되어 생성되었다."

 

위와 같은 라플라스의 학설은 각각 운동량의 분포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 하다는 단점은 있었지만 태양계의 여러 가지 특성을 설명하는데 매우 잘 맞아 떨어졌으며 결과적으로 현대 우주 진화설의 기초가 되었다.

 

1929년 허블에 의해 멀리 있는 은하일수록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속도가 빠르다는 사실이 발견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허블, 실링거 등이 우주가 현재 팽창하고 있다는 주장을 제기하게 된다. 이는 중세 시대에 뉴턴이 생각한 우주관-모든 별들이 등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고 우주는 무한히 펼쳐져 있다-을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1922년에 현대 우주론에서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빅뱅 우주론의 초기 모델인 진동 우주와 팽창 우주관이 러시아의 수학자 프리드만에 의해 제기된 이후 르메트르, 가모브, 와인버그 등이 대폭발 이론을 계속 수정, 보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정상 상태 우주론은 우주가 영원히 같은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빅뱅 이론과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정상 상태 우주론은 은하단의 모습이 원거리에 있는 것이나 근거리에 있는 것이나 거의 같다는 관측 사실에 주목하여 관측자가 우주의 어디서 관측하든 항상 동일하게 보일 것이라는 대칭성과 균일성을 가정한 우주론이지만 질량 보존의 법칙에 어긋나며 1965년 빅뱅 우주론의 결정적 증거인 우주 배경 복사가 발견되면서 붕괴의 길을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