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이전, 삼국시대
중국이나 한국과 같은 동양의 천문 관측 기록은 오래 된 것일수록 언제, 누가, 어디서 관측한 것이라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이는 유럽이나 아라비아의 천문 관측 기록이 개인의 업적이었던 반면에 동양에서는 천문 관측이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져 그 왕조의 역사서에 기록되었다.
1. 삼국시대 이전의 천문학
단군 조선 시대의 천문제단으로 알려져 있는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에 대한 공식 기록은 ‘고려사’에 처음 나오며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참성단은 천원지방의 고대 우주 구조관에 의거하여 지 은 천문 관측대이며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에도 천문 관측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선사 시대인들이 여러 형상을 바위에 새긴 그림을 암각화라고 하는데 현 재 우리나라의 16개 지역에서 암각화가 발견되었다. 울산 천전리, 고령 양전리, 함안 도항리 암각화 등이 대표적인 예인데 암각화가 새겨진 시기는 불확실하나 대개 청동기 기대에서 초기 철기 시대로 보는 견해가 많다. 암각화에는 사람, 짐승, 새나 물고기 등과 같은 그림과 함께 다양한 종류의 기하학적 무늬들이 나타나는데 그 중 하나인 동심원 문양은 태양이나 달과 같은 천체를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함안 도항리 도동 암각화에는 많 은 홈들과 함께 크고 작은 동심원들이 함께 새겨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바위 전체에 새겨져 있는 작은 홈들은 수많은 어두운 별들이고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동심원들은 밝은 별들을 나타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비슷한 시기의 유물로 생각되는 고인돌의 덮개돌에는 인위적으로 파낸 작은 홈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 홈들은 대개 그 깊이가 깊고 안쪽 면이 매끄럽게 갈려 있어 자갈이 빠져나가거나 침식되어 생긴 자연적인 홈과 쉽게 구별되며 이 홈들 중 일부는 하늘의 별자리를 새긴 일종의 천문 기록임이 밝혀졌다. 그 예로는 함안 동촌리의 고인돌에 북두칠성과 좀생이별이 새겨져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이처럼 바위에 홈을 파서 직접 새겨 넣는가 하면 바위 자 체를 하나의 별로 간주하여 바위들을 별자리 모양으로 배치하기도 하였는데 바위 7개를 약 30m 길이로 늘어놓아 북두칠성을 뒤집어 놓는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는 하남시 교산동 토성에 있는 칠성 바위가 그 대표적인 예다.
삼국 시대 이전의 단군 조선의 역사를 담은 역사서 ‘단기고사’와 ‘한단고 기’의 ‘단군세기’편 등에서 약 60여개의 천문 관측 기록이 전해져 온다. ‘단기고사’는 서문과 발문에 따르면 발해시대 대야발(大野勃, 발해의 시조 대조 영의 아우)이 고구려가 멸망한 뒤 13년간의 사료 채집 끝에 727년 발해의 글로 편찬한 것을 825년 황조복이 한문으로 중간한 단군 조선에 관한 역사 서이며 ‘한단고기’는 1911년에 계연수가 편찬한 책으로 안함로의 ‘삼성기상’, 원동중의 ‘삼성기하’, 이맥의 ‘태백일사’, 범세동의 ‘북부여기’ 등과 함께 고려 시대 행촌 이암이 쓴 ‘단군세기’가 실려 있다. 일식이 10회, 오행성 결 집이 1회, 강한 썰물이 1회, 두 해가 뜸(兩日竝出)이 3회, 지진이 4회, 태 풍, 가뭄, 홍수 등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후대로 갈수록 관측 기록의 수가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단기고사’와 ‘단군세기’에 나오는 오행성 관 련 기록과 썰물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각각 다음과 같다.
열세 번째 단군인 흘달 50년(B.C. 1733년. 단군왕검 1년을 B.C. 2333년으로 둠)에 다섯 행성이 루 별자리에 모였다(五星聚婁)
이십구세 단군 마휴 9년(B.C, 935년) 남해에 썰물이 세 척이 물러갔다(南海潮水 退三尺).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슈퍼 컴퓨터를 이용하여 오행성 결집 현상을 슈퍼 컴퓨터로 재연하고 큰 썰물이 기록된 B.C. 935년을 전후한 200년간 해와 달의 위치를 계산, 이들이 지구에 미친 조석력의 세기를 계산하여 그 진위 를 확인한 바 있다.
이와 같이 고인돌의 덮개돌에 새겨진 별자리 등의 유물과 천문 현상 관 측 기록을 통해 우리나라에 최소한 고인돌이 만들어진 시기인 청동기 시대 에 별자리에 대한 상당한 관찰 능력과 지식이 이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 다. 이는 삼국 시대에 중국 천문학이 들어오기 전 이미 고유한 천문 지식이 발생하고 전승되었음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2. 삼국시대
일상생활과 농업, 천체 관측 등의 현실적 필요에 의해 옛날부터 다양한 종류의 시간 측정 의기가 만들어졌는데 유물로 전해 오는 일반 시계는 시간 측정 방법에 따라 해시계와 물시계로 나눌 수 있다. 서기 6, 7세기경 만들 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삼국 시대의 해시계 파편이 경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물통에서 떨어지는 물의 양을 이용하여 밤에도 시간을 잴 수 있었던 물시계로는 신라 시대 때 누각이라는 물시계가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천문 관측 기록으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일식 67회, 행성의 움직임 40회, 혜성의 출현 5회, 유성과 운석의 떨어짐 42회, 오로라의 출현 12 회 등 240회가 넘는 많은 천문 현상이 기록되어 있다. 이중에는 중국이나 일본의 기록에도 남아 있는 것이 있고 우리나라에만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삼국사기’의 ‘신라본기’편에 남아 있는 달이 금성에 접근했다는 태백범월(太白犯月) 기록 5개와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는 태백주현(太白晝見)에 대한 기록이다. 특히 ‘태백주현‘의 관측은 오랜 기간에 걸쳐 금성의 위치 변화를 관측, 추적하여 축적된 지식에 따라 당일 낮에 금성이 하늘의 어디쯤에 자리할 지 대략적으로 위치를 알고, 그 위치를 주의 깊게 관찰해야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당시 천문학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가늠케 한다.
삼국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 중 하나인 첨성대는 오늘날의 천문대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신라의 첨성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신라 시대의 선덕여왕 때 세워진 첨성대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존재하는 천문관측 시설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높이가 9m, 밑지름이 5m, 윗지름이 3m 정도 되는 돌로 쌓은 건축물이다. 몸통을 원으로, 머리를 정사각형으로 만들어 당시의 우주 구조론이었던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생각이 반영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며 고대 문명에서의 천문 관측은 학문적 의미보다는 점성술적 의미가 강한 경향이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축적된 천문 자료를 위한 천문 관측보다는 일식이나 혜성과 같은 천문학적 이 상 현상을 기록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의 첨성대 외에도 고구려와 백제에도 첨성대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역사 기록 곳곳에 남아 있 다. 고구려의 첨성대는 세종실록의 ‘고구려의 천문대는 평양부에 있었는데 성안에 9개의 묘와 9개의 못이 있으니, 9묘는 곧 9개의 별이 날아 들어온 곳이며, 그 연못 옆에 첨성대가 있다.’ 라는 기록과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에 소장되어 있는 평양전도, 그리고 1530년 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 에 의해 그 존재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우리나라 고유의 별자리 이름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때는 삼국시대로, 특히 돌로 무덤의 방을 만들었던 고구려 고분의 벽이나 천장에 그려진 벽화에는 별 그림과 함께 별자리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현재까지 전해져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로 된 별 이름으로는 북극성, 북두칠성, 견우성, 직녀성 정도로 극소수에 불과하다).
5세기 중엽 고분인 중국 집안시에 위치하고 있는 장천 1호분의 천장 북 쪽에는 동그란 원들이 한 줄로 연결되어 그려진 북두칠성이 있고, 동쪽과 서쪽에는 해와 달이, 남쪽에도 선으로 이어진 일곱 별과 낱별 두 개가 있는데 그 그림 가운데에 ‘北斗七星’이라는 한자가 쓰여 있다. 서기 6세기경 만 들어진 평안남도 대동군 덕화리 2호 무덤에는 북두칠성과 남두육성 등을 비롯하여 팔각 고임무덤 천정을 빙 둘러가며 약 72개의 별이 그려져 있는 데 그 옆에 실성, 벽성, 위성, 정성, 류성 등과 같은 28수 별자리 이름이 한자로 차례로 쓰여 있다. 고구려 고분에 그려져 있는 천문도는 북극성을 중시했던 중국과 달리 북두칠성을 중시하고 있고 중국식 28수 별자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연결된 별자리가 나타나며 별자리 배치가 중국의 천문 바위 개념과 다른 고유한 특징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천문학이 단순하게 중국을 모방하는 차원을 넘어 자체적으로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1. 고려시대
고려 역법의 기본적인 틀은 822년에 당에서 사용하던 선명력이었으나 원에서 이슬람 천문학을 흡수하여 수시력이 만들어지자 이를 도입하여 사용 하였다. 이와 같은 고려 시대의 천문 역산의 발전은 조선 초에 칠정산이 발간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고려는 개국함과 동시에 신라와 당나라의 제도를 참고하여 태복감과 태사국을 두어 천문, 역산 등을 담당케 하였고 이후 이 두 기관이 통합되어 서운관, 관상감 등이 만들어졌다. 이 관처의 관리들은 해를 관찰하고, 역법을 관리하며, 물시계를 담당하고, 시간을 담당하는 전문가들이었다. 이들은 이후 천문학 분야의 관리를 직접 교육, 선발하기도 하였다. 고려 시대의 시 계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 ‘고려사’의 ‘역지’에 해시계와 물시계를 사용하여 시간을 결정하는 법이 상세히 나와 있고 일식 시간을 예보한 기록을 보아 분명히 전문적인 시간 측정이 이루어졌다고 추정된다.
고려 시대 천문학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으로 11세기 초부터 특히 많이 기록되어 남아 있는 수많은 천문 관측 기록들을 들 수 있다. 개성부 읍지인 ‘중경지’에는 ‘첨성당은 만월당 서쪽에 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고려 왕궁이었던 만월대의 서쪽에는 지금도 고려 시대 천문대의 축대 부분이 남 아 있다. 그 축대의 상판에는 관측 기구를 고정하는 데에 쓰였다고 생각되는 크고 작은 구멍이 여럿 있는데 ‘고려사‘에 기록된 많은 천문 관측이 이 와 같은 천문대에서 수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천문 관측이 활발했던 만큼 많은 천문도가 제작되었으리라고 추정되나 오늘날에는 천문도가 제작 되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와 석실형 고분에 그려진 벽화만 전해지고 있다. 고려 고분 벽화의 별그림은 고구려와 조선 시대 천문도 사이의 공백을 메워 주는 값진 것으로 고구려 고분 천문도의 형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편 ‘고려사’의 ‘천문지’나 ‘증보문헌비고’에는 흑자(黑子)로 표기되어 있는 태양 흑점 기록과 적기, 적침 등으로 표현된 오로라 관측 기록이 각각 실려 있다. 이 기록들을 분석해 보면 흑자와 적기 모두 약 11년마다 기록이 반복되는 주기성을 보이는데 이는 현재 알려져 있는 흑점과 태양 활동의 단 주기 11년, 태양 활동의 변화에 의해 조절되는 오로라의 특징과 일치한다. 이는 서양에서 태양 활동 주기를 발견한 때보다 최소 500년 이상 앞선 관측 자료다. 또한 고려의 천문학자들은 일식을 계산하여 그 일어날 시간을 미리 예보하였는데, 이러한 예보가 크게 빗나갈 때에는 처벌을 받았다는 역 사 기록 역시 일식을 미리 예보할 수 있을 정도의 천문 기술 수준이 고려 천문학에 확립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표 3-1에 고려가 남긴 천 문 현상의 종류와 기록 수를 나타내었다.
2. 조선시대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즉위한지 4년 되던 해에 고구려 천문도를 바탕으로 하여 새로이 천문도를 만들어 돌에 새겼는데 이것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석각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다. 이는 ‘하늘의 황도 부근을 12 지역으로 나눈 '12차'와 이에 대응되는 지상의 지역인 '분야'에 맞추어서 그린 천문도’란 뜻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천문도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이름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보면 서양에서 하늘의 별을 바로 88개의 별 자리로 나누는 것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하늘을 크게 사방과 중앙의 다섯 구 역으로 나누어 다섯 별자리 구역을 다시 중궁 3원과 사방 28수로 나눈 뒤 3원과 28수의 구역 안에 있는 별들은 또다시 여러 작은 별자리들도 세분화 하는 3단계로 구성된 별자리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천 상열차분야지도에는 조선 시대 전 기간에 걸쳐 지식인들이 갖추어야 할 전 통 천문 지식이 총 망라되어 있는데 특히 각 별자리에 대응하는 지상의 지 역을 다른 천문도에서처럼 중국의 지명을 쓰지 않고 우리나라의 지명을 사용하는 자주적인 면도 엿보인다.
고려 때의 전통을 이어 조선 왕조는 관상감을 두어 지속적으로 천문 관 측을 하였으며 백두산, 한라산, 금강산 등으로 관측을 위해 임시 관측대를 파견한 기록도 남아 있다. 이러한 열성적인 관측에 의해 발견된 8000개 이 상의 이상 천문 현상은 지금까지 기록으로 전해진다.
특히 세종 시대에는 여러 천문 기구들이 발명되어 조선 시대에 천문학이 가장 발달한 시기라 말할 수 있다. 물시계인 자격루가 발명되었고 물시계 기능과 여러 가지 천문 현상을 그대로 나타내는 옥루가 발명되었다. 간의는 지름이 2m 정도 되는 간단하고 편리한 천체 위치 관측 기구인데 간의를 가설하기 위한 간의대를 경복궁 안에 세워 관리들로 하여금 지속적인 관측을 담당케 하였고 이를 대간의대라 하였다. 또한 일식, 월식, 혜성의 출현과 같은 천문 현상이 나타났을 때 임시로 사용하기 위해 규모가 작은 간의대들을 여러 곳에 설치하고 관천대라 칭하였다. 대간의대 바로 서쪽에 세운 동표는 태양 고도 관측 장치로 태양의 고도를 정확히 관측하는 일은 천문 계산법 또는 역법에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혼천의는 본래 천체 운동 관측 장치로 개발된 것이지만 실제로는 검은 천 위에 그려진 별자리들이 하루에 한 번씩 저절로 돌게 되어 있고 별도로 태양의 운동이 물의 힘에 의해 자동으로 나타나는 자동식 천체 운동 모형이고 앙부일구는 세종 때 제작된 여러 가지 해시계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발 명품이다. 또한 해와 별을 관측하여 시각을 알려주며 낮과 밤에 함께 사용 할 수 있는 시계인 성정시의가 발명되었으며,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역법서 인 칠정산이 완성되었다. 칠정산이 원나라의 수시력과 이슬람 천문학을 완전히 수용하여 완성됨으로써 일식과 월식을 포함한 천체 운동을 정확히 예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그 당시에 최고의 수준에 달했던 수학적 천문 학을 완전히 흡수함으로써 조선의 천문학이 당시 세계 최고의 수준에 달했음을 의미한다. 이 외에 제가역상집, 천문유초와 같은 천문학 서적들이 발간되어 조선 시대 천문학 교육의 기본 참고서로 이용되었다. 조선의 전통 천문학은 임진년(1592년)과 정유년(1597년)의 왜란으로 인해 대부분의 천 문 의기가 소실되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소실되었던 의기 등을 약 200년 의 세월에 걸쳐 복구하면서 조선의 천문학은 회복되기 시작하였으나 17세 기 들어 중국을 통해 서양 천문학이 전래되면서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서양의 과학 기술이 명청 시대 및 조선 시대 엘리트 층에 급속하게 파급될 수 있었던 것은 서양 성직자들이 명말 청초에 걸쳐 유교적 한자 문화 권인 한족 사회에 천주교를 전교함과 동시에 서양 문명을 전수하기 위해 서 양의 종교, 윤리와 지리, 천문, 역사, 과학, 기술 관계의 서적을 한문으로 번 역 또는 저술한 ‘한역서학서’라고 하는 책이 전해지면서부터다. 한역서학서 와 함께 마테오 리치가 만든 세계 지도 ‘구라파국여지도’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 현재까지 전해지지는 않고 있지만 이는 후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등 우리나라의 지도 제작을 자극했을 것으로 생각되며 당시에 만연했던 중국 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신호탄이 되었다.
또한, 서양식 역법으로 만들어진 중국의 시헌력을 도입하여 17세기 중반 우리나라는 서양식 방법으로 만든 음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우리 나라 천문학의 중심은 역법이었고 우주 구조론에는 무관심한 경향이 있었으나 서양 역법이 도입되면서 서양의 우주 구조론에 대해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는 시헌력이 이미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우주 구조론을 형성하고 있던 중국의 우주 구조론과 상충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 이다. 결과적으로 시헌력의 사용은 서양 천문학 전파의 폭을 넓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서양 천문학의 수용을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12 중천설과 지 원설 그리고 지전설이다. 17세기 이후 우리나라의 우주 구조론에 큰 영향을 미친 서양의 12 중천설은 우리나라 전통 우주 구조론인 중천 개념과 거의 흡사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고, 이외에 마테오 리치가 만든 지도가 전파 되면서 네모반듯한 모양이라는 전통적인 동양의 땅의 형태가 구형으로 확실하게 변화되어 인지되기 시작하였다. 이외에 조선 후기 천체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지전설의 등장이다. 지전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서 하루에 한 번씩 자전을 하여 낮과 밤이 생긴다는 것으로 지구의 자전을 뜻한다. 서양 선교자들이 지동설을 이단시하고 천동설을 바탕으로 한 우주 체계만을 우리나라에 전파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에 지전설이 등장한 것은 조선 시대 서양 천문학의 수용이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며 이는 우리나라 17세기 천체관을 진일보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지전설을 처음 주장한 학자는 김석문으로 그의 지전설은 조선 시대 천문 학에서 그의 지전설은 후대 학자들에게 지전설의 논거와 원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김석문의 우주 체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구를 중심으로 부동천인 태극천이 가장 외곽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안의 천 체 공간이 태허이다. 이 태허가 미동해 그 다음 천인 경성천을 만들어내는데 이 경 성천이 태허 중에 회전 속도가 가장 느리다. 경성천은 2만 4천 4백 40년 만에 태허를 서에서 동으로 일주한다. 경성천 다음이 진성(토성)이며 회전 속도가 점점 빨 라져 29년만에 역시 서에서 동으로 태허를 일주한다. 그 다음 세성(목성)은 12년에 일주하고 형혹은 2년에, 그 다음 일륜은 1년에 태허를 일주한다. 그 다음은 태백(금성)과 진성인데 항상 일륜과 같이 회전하며 그 다음인 월륜은 그 움직임이 더욱 빨라져 1년에 태허를 12주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아래에 있는 지질(지구)은 그 움직임이 가장 빨라져 1년에 태허를 366회전한다.
이와 같은 김석문의 우주 구조론은 서양 우주 구조론과 우리나라 전통 우주론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부분만을 추출하여 새로운 우주관을 정립했 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실학자 이익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지원설을 받아들여 ‘땅은 둥글 다. 그렇다면 둥근 땅 위에서는 어느 나라가 꼭 중앙을 차지한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중국 사대주의를 비판하였다. 이 외에도 홍대용은 그의 문집 ‘담헌서’에 전해지는 ‘의산문답’이라는 글에서 지전설과 우주 무한론을 주장하였고 이를 근거로 중국의 중화 사상을 부정, 중국을 지구 세계와 비교한다면 십수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근대적인 우주관과 세계관을 주장 하였다. 홍대용의 우주관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우주의 뭇 별들은 각각 하 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고 끝없는 세계가 공계에 흩어져 있는데 오직 지구만 이 중심에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 무한 우주론으로 이는 그 이전에는 동 ? 서양을 막론하고 찾아볼 수 없는 실로 대담하고 독창적인 것으로 탈지구중심론이라는 인식론적 대전환을 제기했다는 측면에서 과학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며 역사학적으로는 조선 시대에 팽배했던 중국 사대주의 를 비판하고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했다는 역사적 의미도 지닌다. 이렇듯 조 선 시대에 서양 천문학의 유입으로 발달한 천문학적 지식은 실학자들이 중국 중심적인 사상을 극복하여 자기 나라와 민족에 눈을 뜨는 데 크게 영향 을 미쳤으며 조선 후기 천문학이 단순히 유교적인 우주관에서 벗어나 실학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결과적으로 서양 천문학의 도입은 그 동안 발전이 미미했던 우주 구조론 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논의가 되었던 유교적 우주관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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