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향재 선생 담권학요의(답기자문)
대성권 종사 왕향재 선생은 명성이 널리 알려지고 평소 전국의 무술가들의 칭송이 자자하다. 최근 경문(京門)에 살고 계신데 권술을 참관하기 위해 특별히 매주 일요일 오후 1시에서 6시까지 대양(大羊) 의빈(宜賓) 골목 1호에서 각계의 사람들을 초대하여 권학 명가들과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상무정신을 날로 발양광대 하는 것으로 의미가 매우 크다. 어제 기자는 왕 선생님을 방문하여 아래의 문답을 하였다.
문: 왕 선생님은 권술이 뛰어나 평소 존경을 받고 계신데 선생의 권학에 대한 포부는 어떠하신지 감히 여쭙겠습니다.
답: 친구들로부터 대성권의 대표자라는 칭찬을 받아 부끄럽습니다. 저는 청나라 광서(光緖) 33년에 북경을 떠나 사방을 돌아다니며 교류를 넓히고 만나 본 명인들이 매우 많습니다. 세상의 쓴맛도 많이 보았고 30여 년 동안 얻은 대가는 좋은 선생과 유익한 친구들이었으며 서로의 기술을 갈고 닦았으므로 권학에 대해서는 늙은 말이 길을 알듯이 경험도 많고 능숙하다고 자신합니다.
일전에 장옥형(張玉衡) 선생이 신문에 몇 번 저에 대한 평술을 하였는데 혹이나 각계의 인사들이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를 일으킬까 두려워 본인의 진의를 성실히 알리고자 합니다.
저는 나이가 많지만 생활이 자유롭고 명예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마음에 조급한 것은 이 몸이 완전히 쇠약해지기 전에 세상의 현명한 자들과 힘을 합쳐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본능과 무덕을 제창하고 넓히며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이단을 제거하려는 것일 뿐, 헛된 명예를 좇아 세상을 속여 이름을 훔치고자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문: 권학은 무엇으로 기본을 삼는 것입니까?
답: 권학의 기본원칙이 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저마다 말이 다르지만, 권법 투로를 익히거나 초식을 강조하거나 때리기를 연습하는 것은 모두 표면적인 것에 속하는 것입니다. 투로가 유행한지는 오래되었지만 사람을 속이는 것이 매우 심합니다.
문: 형의, 태극, 팔괘, 통배는 속칭 권술의 내가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 파를 구별하는 것입니까?
답: 세상에서 형의, 태극, 팔괘, 통배를 내가라고 하는데 저는 내가, 외가의 이름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 모르겠고 논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선배 명인들이 논한 것을 가지고 그 일부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형의권 직계는 하남 심의파(心意把), 육합보와 한 집안으로서, 하남의 이대동(李岱東)은 이치화(李致和) 선생의 증손이고 이치화 선생이 바로 대룡방(戴龍邦) 선생의 스승입니다. 제원(濟源) 완(阮)씨는 명명한 것은 비록 다르지만 실제는 이치화 선생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대룡방 선생은 비록 심의를 형의로 바꾸었으나 원래의 뜻을 어긴 것은 아닙니다. 형의권 적전에는 12형 연법이 없고 주신(周身)12형의 의미만이 있을 뿐이며, 또 오행의 생극을 논한 적이 없고 단지 오행을 가리켜 다섯 종류의 힘의 대명사라고만 했을 뿐 수법이나 투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일찍이 선사들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있습니다
: 오행은, 금(金)은 근골은 힘을 품고, 의념은 쇠와 돌처럼 견고하여 쇠를 자르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목(木)은 면적이 있는 것을 구부린다는 것으로 마치 나무가 지탱하고 있는 형세와 같다. 수(水)는 기세가 바닷물이 크게 유동하여 활발함이 용과 뱀과 같아 사용함에 침투하지 않는 구멍이 없는 것이다. 화(火)는 힘은 화약과 같고 손은 총알이 발사되는 것과 같아서 일촉즉발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토(土)는 힘을 쓰는 것이 돈후하고 넓고 충실하며 혼원하고 기운이 장엄하여 천지와 서로 접하여 일체가 되는 기세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오행합일이니, 지금 사람들이 툭하면 말하는 무슨 권이 무슨 권을 극한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만일 눈으로 본 것을 재차 생각한 연후에 출수하여 적을 상대한다면 패하지 않는 자가 드물 것입니다.
팔괘장의 원명은 천장(川掌)이라고 합니다. 나는 어려서 일찍이 정정화(程廷華) 선생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모습이 신룡이 공중에서 움직여 백가지로 구부러지고 천가지로 돌아 남들이 그 공력을 쫓기가 어려웠음을 기억합니다. 멀리 동해천 선생을 생각해 보건대, 더욱 그 넓고 깊은 경지에 들어갈 바를 몰랐습니다.
유봉춘(劉鳳春) 선생도 저와 교류가 있었는데 공은 매우 깊었으나 조예는 약간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또한 64장 이나 72퇴를 익힌 자들이 바라볼 수 있는 경지는 아닙니다. 바라건대 팔괘장을 익히는 자들은 쌍단의 천장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매 동작에서 의념을 더하여 체득하고 깊이 나아가기를 힘써 구하고 이론상에서도 또한 착실히 연구해야 합니다. 그것을 평소에 늘 행한다면 거의 다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태극권의 적전은 양징보이니 이 또한 저의 절친한 친구입니다. 태극권은 몇 가지 역학(力學)적인 함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 요체를 얻은 자는 백에 하나도 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능하기는 하지만 구체적이지는 못한데 이는 기초를 체득할 시간이 일찍 사라져서 하체에 마땅히 있어야 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태극권은 원래 삼권(三拳)으로 되어 있고 노삼도(老三刀)라고도 불렀는데 왕종악 선생이 13식으로 고쳤고, 다시 한번 변하여 140, 150식으로 많이 변하였으니 이것이 실진(失眞)의 주원인 입니다.
만일 양생으로 논하면 쓸데없이 정신과 기질을 구속하여 편안하지 못합니다. 또 기격을 논하면 오로지 몸의 사용을 제재하기 위한 것일 뿐, 사용하는 몸을 기계처럼 딱딱한 물건으로 만들어 배우는 자로 하여금 신경이 어지러워 시간만 낭비하게 할 뿐입니다.
단련법을 보면, 권(拳)과 장(掌), 퇴(腿)와 각(脚)이 불쌍하고 우습습니다. 적을 상대하면, 고수를 만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상대방이 딱딱하게 굳은 사람만 아니라면 비록 이쪽이 태극권의 명수라도 그 기술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근 20년간 태극권을 익히는 사람들은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가 많고 설사 혹 분별을 하더라도 또한 제대로 행하지를 못합니다. 일반적으로 배우는 사람들은 그저 남의 말만 듣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권을 파멸시켜 못쓰게 하였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태극권의 지도자들이 신속하고 엄격하게 정리를 하여 장래를 도모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태극권에 대해서 감히 깊이 아는 것처럼 말했으나 논함이 정밀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를 알고 저를 비판하는 것은 오직 고명한 자만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태극권을 배워 얻음이 있는 자는 내가 논한 것을 관찰해보면 머리를 끄덕이고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게 될 것입니다.
통배권은 화북에서 통행되었습니다. 내가 만난 자들은 대부분 형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론은 대략 옳은 자도 있었으나 그 실제를 보면 차이가 심했습니다. 생각건대 선배들은 이렇지 않았으나 후대에 실전된 것 같습니다. 비록 우연히 부분적으로는 절대의 공력이 있다고 하는 자들도 결국은 쉽게 권학의 궤도로 걸어가지는 못하였습니다.
매화권은 오식장이라고도 하고 그 적전은 지금까지도 유전되어 하남, 사천에서 가장 성하고 복주, 흥화, 천주, 산두 등지에서 오기산수를 익히는 자들과 방법은 다르나 효과는 같습니다. 적을 상대하는 데에 독특한 장점이 있으나 안타깝게도 편면적인 것이 많고 구체적인 것이 적습니다.
팔번(八飜), 면장(綿掌), 벽괘(劈掛), 팔극(八極), 대공력(大功力), 삼황포(三皇砲), 염퇴(粘腿), 연권(連拳)은 서로 장단점이 있는데 대부분 강이 많고 유가 적어 정신을 안으로 거두어 들이는 공부가 부족합니다.
대소홍권(大小紅拳), 탄퇴, 착각은 각 권의 장단점 및 기타 문파들을 구체적으로 알고는 있으나 더 논하지 않겠습니다.
문: 선생께서는 국술을 보존하는 것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십니까?
답: 우리나라의 국술은 난잡하고 어지러워서 사람들로 하여금 어찌 할 바를 모르는 탄식을 자아내게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정수를 버리고 단지 찌꺼기만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동양의 무사도나 서양의 권투는 비록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모두 각자 이른 곳이 있어서 우리나라의 일반 권법가와 비교하면 천지의 차이가 나니 부끄러워 죽을 지경입니다.
그러므로 구학(舊學)을 정리하고 발양 광대 하려하면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하겠습니까? 구구이 고루함을 무릅쓰고 높이 제창한다면 그 종지가 여기에 있게 될 것입니다.
문: 선생께서는 이번에 정기적으로 각계의 인사를 초대하여 겸허히 무도에 마음을 쏟고 계신데 이에 대해서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신지요?
답: 학문의 도는 비교로써 증진되는 것이니 권술 또한 그러합니다. 비교에는 승부가 있으나 인격에 대해서 손상되는 것이 없고 뿐만 아니라 인격과 도덕이 이에 의지하여 높아지게 됩니다. 교류하며 서로 배우다 보면, 문호의 다툼도 피할 수 있고 함부로 비평하는 것도 막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을 허황되게 여기지 말고 각지의 현사들이 모두 모이기를 바라니 만일 왕림하여 가르침을 주고자 한다면 기꺼이 환영합니다. 쉽게 발걸음을 하기 어렵다면 편지로 의견을 보이는 것도 괜찮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권술의 정진을 구하는 것이라면 나머지는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 선생께서는 대성권의 종사이시니 본문의 권술에 대해 분명히 탁월한 지식이 있으실 겁니다. 그 상세한 가르침을 청합니다.
답: 권학은 지극히 복잡하나 그 대요를 잡자면 지극히 간단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권을 배우려면 마땅히 먼저 무엇 때문에 권을 배우는지를 연구해야 합니다. 인식이 쉬워져야 얻는 것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 권을 배우는 것이 첫째는 건강을 위해서 이고, 둘째는 호신을 위해서 입니다. 건강한 신체는 사람의 모든 일의 기초이니 양생의 도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릇 단련의 법은 제대로 배우면 이득이 적지 않으나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죽음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극렬하게 운동하는 사람들 중에는 장수하는 자가 드뭅니다. 권술가 중에도 단련의 잘못으로 인하여 남은 수명을 손상하는 자 얼마나 많은 지 알 수가 없으니 이는 참으로 불쌍하면서도 웃기는 권술입니다.
권술의 이득과 폐단을 알고 운동 시에 동정의 사이에서 의념을 더하여 몸으로 관찰하여야 하니 단지 신체의 외형상으로만 여러 가지 형태의 운동이 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마땅히 신의(神意)를 사용하여 전신 내외의 일거 일동이 건강과 호신의 조건에 부합하는지, 동이란 무엇이고 정이란 무엇인지 결과는 무엇인지 중간과정의 현상이란 무엇인지를 관찰하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체인하여 잡아나간다면 거의 도달할 수 있을 것이고 정미한 요체에 대해서도 비로소 이어서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쉽게 얻어지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대성권의 요의를 간술한 것인데 동지들에게도 물어보았던 것으로 권학상의 토론인 것입니다. 앞에서는 권학의 단계를 말하였습니다.
이상에서 말한 건강, 호신의 두 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하나를 잃으면 폐단이 생겨 잘못된 길로 들어가게 됩니다. 먼저 기질적인 본능에 정신의 훈련과 배양을 더한 연후에야 비로소 신경과 사지의 본래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권을 배우는 제1보는 바로 신경의 단련을 기초 단련법으로 삼아 사지 백해의 꿈틀거림을 체인하는 것이고, 제2보는 시력, 시성의 연습이고, 제3보는 호신입니다. 다음에 나누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1)기초훈련:우리들은 일상생활 중에서 걷고 서고 앉고 눕는 것이 수시로 상황에 따라 제대로 훈련을 받도록 할 수가 있는데 반드시 먼저 참장법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전신의 구조를 적당히 안배하여 신체를 단정하게 하고 의념을 비우고 고요한 상태에서 신경을 정돈하고 호흡을 가다듬고 근육을 온양하여 각 세포가 자연스럽게 발동하여 힘이 안에서 밖으로 이르러 전신을 통하게 합니다.
이렇게 하면 근골을 단련하지 않아도 스스로 단련이 되고 신경을 기르지 않아도 스스로 길러집니다. 또 반드시 그 미세한 동정을 몸으로 살펴야 합니다. 노력과 시간이 어느 정도 이르게 되면, 이렇게 일단 참장을 서면 무궁한 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권공(拳功)의 묘용을 다하고자 하면 마땅히 먼저 참장법에 힘을 다해야 합니다.
(2)시력(試力)과 시성(試聲):권학이 이미 기초 훈련이 생기게 되면 그 능력이 날로 강해집니다. 운용에 있어서는 마땅히 인욕의 지배와 환상을 야기하는 오용을 엄히 막아야 합니다.
왕왕 본능의 역량이 인욕의 지배로 인하여 오히려 본능의 요구에 적합하지 않는 운동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조장함이 없어야 합니다. 운용이 요구에 적합 하려면 먼저 힘이 움직이는 상황을 인식하여야만 계속하여 다음 단계를 연습할 수 있습니다.
시력은 권공의 입문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서 시력은 힘을 얻는 근원이니 힘은 시(試)로 말미암아 알게 되고 앎으로 말미암아 그 사용하는 바를 얻게 됩니다.
처음 시력을 할 때는 반드시 전신의 기력이 고르고 근육이 영활하고 골격이 지탱하도록 하여야 근육이 수렴되고 방송되어 서로 쓰일 수 있습니다. 힘은 마땅히 안에서 밖으로 발해야 한다. 동작은 느린 것이 빠른 것보다 좋고 이완된 것이 급한 것보다 좋으니 움직임이 미세할수록 신(神)이 더욱 온전해집니다.
움직이려고 하나 또 멈추고, 멈추려고 하나 또 움직이니, 멈추지 않을 수 없는 데에서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데에서 멈추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시력은 일부분에 힘이 들어가도 안되지만 절대적인 힘이 들어가는 것은 더욱 안됩니다.
먼저 전신의 기력이 원만한지, 힘이 수시로 발출 되는지 자신이 공기와 더불어 호응작용을 발생하고 있는지를 몸으로 느껴야 합니다. 의념이 끊어지지 않게 신(神)이 흩어지지 않게 하고 경중을 헤아려 발하기를 기다렸다가 한 곳이 움직이면 전신이 끌려가도록 합니다.
기력이 일치하면 허령하고 충실하여 원만해져 상하 좌우 전후가 잃는 것이 없게 됩니다. 총괄하여 말하면, 편안히 이르러 힘을 얻은 것이 아니면 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시성은 시력의 부족을 보조하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의 생리 구조는 선천적인 관계가 각각 다르므로 삶 또한 통하기 어려운 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시성은 바로 신체 내부의 호흡의 공부로 그것을 보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내호흡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뇌배호흡이라고도 합니다.
(3)自衛:이것은 바로 기격을 이르는 것입니다. 먼저 큰 움직임은 작은 움직임만 못하고 작은 움직임은 움직이지 않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움직이지 않아야 비로소 생하고 생 하여 그치지 않는 움직임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형태가 있는 움직임은 움직이지 않을 때는 힘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른바 움직이지 않는 움직임은 움직여도 마치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아서 한번 움직이고 한번 멈추는 것이 서로 그 뿌리가 되어 그 운용의 묘는 신경의 지배와 의념의 유도 및 대소 관절, 인대 신축의 상호 작용, 마디의 견강함과 회전하는 쟁력, 중추의 전이, 중심노선의 안정, 호흡의 운용이 발하는 탄력에 달려 있으니 능히 그것을 사용함에 합당한 기틀을 얻는다면 기격의 기초가 갖추어질 것입니다.
이상에서 말한 것은 대부분이 추상적이지만 그 중에 많은 의미는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지만 만일 익히고 행함에 멈추지 않는다면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움직임의 큰 것과 작은 것의 구별은 실제로 개인의 기초공부가 각종 힘에 대하여 몸이 의념의 명령을 얻었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손을 들고 발을 움직임에 전신의 곳곳이 모두 역학(力學)적인 본령을 품고 있다면 움직임이 커도 되고 작아도 됩니다.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것도 모두 괜찮습니다. 그러나, 만일 전혀 역학(力學)적인 능력이 없다면 어떻게 하더라도 안됩니다.
힘을 쓴다는 것과 힘을 쓰지 않는다는 것의 구별도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대부분 일반인의 움직임은 피가 주입되지 않으면 힘을 낼 수가 없는데 모든 피가 주입되는 힘은 막히고 화함의 잃어 위생적이 못합니다. 피가 주입되지 않아도 힘이 있는 것이 바로 힘을 쓰지 않아도 힘이 있는 것이요, 사용 시에만 힘을 얻는 것이 바로 본능의 힘인 것입니다.
또 아무것도 없이 의념을 빌려 실제를 구하는 것 등은 미묘한 것이어서 더욱 필설로는 만에 하나도 설명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대성권은 외형의 우열에 달려있지 않고 한 가닥 의념의 반응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형질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으로서, 기교가 수준에 이르면 비로소 생각치 않고도 그 기묘함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니 그 의미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문: 전번에 신문에 담화를 발표하셨으므로 최근에 방문한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 중에 고명한 사람은 없는지요?
답: 여러분들의 관심과 제창을 입어 저는 매우 위안이 됩니다만, 북경의 사람들 가운데는 찾아와 가르침을 준 사람이 여전히 없습니다. 단지 각지에서 마음을 표시하러 온 사람들은 많습니다. 또 여러 곳에서 와서 토론하거나 저를 무술교사로 초빙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진실로 권학을 연구하려는 사람이 매우 많아서 스스로 와서 청하는 사람도 많고 다른 사람의 소개를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무릇 제창의 의미는 바로 이 점에 있으니 결코 남과 다투는데 있지 않으며 더욱이 경쟁을 하는 것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권학에 대해 상당한 인식을 가지기를 바라며 권학의 제정이 근본적으로 개선되어 승부로서 영욕을 삼지 않기를 바랍니다. 권술 동지들이 맹목적으로 이것 저것 섞어서 마음대로 단련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지 않기를 바라며 더욱이 건강을 지향하는 권학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돌팔이 무술가로 흘러가 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 권법을 익히는 자들은 백 명 중에 한 명도 제대로 된 자가 없이 대부분 눈을 들어 보면 전부 잘못되었다는 느낌입니다. 권법에 의지하여 생계를 도모하는 권사들이 제자를 가르치게 된 후에도 남을 따라 배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면, 정신적으로도 스스로 고민하지 않고 응당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을 따라 힘써 배워 반드시 시시각각 자신이 가르치는 남의 자제들을 잘못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양심을 가질 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권사들은 권학의 정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단지 이에 의지하여 생활만을 도모하니 다만 결코 신비하거나 강폭함을 사람들에게 말하지만 않는다면 크게 잘못되지는 않겠습니다만 이들 중에는 견식이 얕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일시에 모두 감화시키기는 어려우니 차차 깨달아 스스로 반성하도록 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문: 무도는 어느 땐가 일어나 문파가 많아지고 각자가 모두 옳다고 하므로 배우는 사람은 망연하여 무엇을 따라야 할지 모르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요?
답: 세계의 모든의 학술은 모두 비교를 거친 후에야 우열을 구분할 수 있으니 그렇지 않으면 각자 자신이 옳다고 하므로 문외한은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권은 단지 승부라는 한가지 만으로 시비의 준칙을 정할 수는 없고 합리적인지의 여부, 삶의 요구에 적합한지의 여부로써 하여야 합니다.
이른바 합리적이라는 것은 편안하게 힘을 얻어 재미가 있는 경지에 이르지 않은 것은 권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권술의 역사를 아느냐 모르느냐는 깊은 관계는 없으며 다만 학술 방면에서 연구의 가치가 있느냐는 것과 인생의 필요에 적합한지의 여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권학을 말해보자면 비록 오래된 역사를 가졌으나 전국시대에 비로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점차 전진과 변화를 하다가 당, 송 시대에 이러한 기술이 모여 유파를 이루었고 원, 명, 청초에 가장 성하여 익히는 자들이 많았는데 공력의 조예가 다르고 식견과 지혜가 차이가 나서 그에 따라 파벌이 나누어져 각자가 옳다고 하니 즉 이른바 지금의 각가(各家)라고 하는 것입니다.
청나라 강희, 옹정 시대에도 화기가 아직 성행하지 못하므로 이 도(권술)가 나라에 이득이 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이 도를 붕괴시켜 쓰여지지 못하도록 하고자 하여 문을 높이고 무를 경시하였는데 한 방면에서는 비선검객을 제창하여 신비함을 보이고, 다른 방면에서는 투로를 제창하여 서로가 다른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중용의 대도를 물어서 얻을 수가 없게 되었고 다시 희극과 소설을 이용하여 선전 도구로 삼고 다시 권을 익히는 자로 하여금 사대부들에 의하여 천대를 받도록 하였으니 마침내 오늘과 같이 더욱 수준이 낮아지고 추태가 백가지로 드러나는 날이 있게 된 것입니다. 진실로 안타깝고 애통한 일입니다.
다행히 우리 권학의 선배들은 은밀히 전인을 두어 마침내 한 줄기 광선을 남겼습니다. 근 20여 년간 각지에 비록 전문 과목을 설치하여 제창하였으나 제창이 빨라질수록 파산도 더욱 빨라져 영원히 권학의 궤도를 걸을 수 없었습니다.
그 실제의 배움이 본래 어렵지 않으나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소설의 해독을 받았고 또 지금의 권사들은 대부분 이것으로 생계를 삼기는 하나 권학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망연했고 설사 깨달은 자가 있더라도 다시 남을 따라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하니 역시 어찌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근 반 년간 여러분 중에서 간혹 나에게 와서 보잘것없는 몸으로 시범을 보인 자들이 있는데 저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히 밝지는 않겠습니다. 그 사람도 먹고 살아야 되니깐요. 지금 모두가 자신이 잘못된 것을 알고 있는 자들이 많으나 무엇 때문인지 공개적인 토론을 하기를 꺼리고 더군다나 실력을 비교하여 학술의 증대를 구하려고 하지도 않으므로 마침내 양심이 꼬여 오히려 남의 잘못을 꼬집어 몰래 유언비어나 퍼뜨릴 줄만 알고 겉으로는 모른체 하니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직업이 없는 자들은 무술에 능하다고 생각되면 신비한 권파를 만들려고 하고, 연극을 하는 융통성 없는 아마추어 배우들은 다만 주의를 끌려고 현란한 동작만을 하니 참으로 같이 상대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일 나의 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된다면 무직업의 권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가르침을 주기를 청해도 되겠습니까?
또 바라건대 우정어린 시범을 보이는 것이 인격과 밥 먹는 데에 있어서 모두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만일 직접 왕림하여 가르침을 줄 수 없다면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면 내가 시간을 꼭 지켜 가서 뵙고 만일 조금이라도 장점이 있으면 힘을 다하여 그를 위하여 선전을 할 것이고 만일 취할 것이 없더라도 입다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문을 닫아 걸고 스스로 제일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일 푼의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문: 선생님의 논의를 들어보면 국술의 요도를 밝히시어 새로운 국면을 열어 여러분들을 위하여 행복을 도모하고 계신데요, 그러나 태극권을 지적하신 부분은 좀 지나친 곳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답: 저는 도에 대한 인식이 아직은 낮으므로 감히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고 말할 수는 없고 다만 선배들의 전통을 준수하여 넓혔을 뿐입니다. 태극문 중에는 저의 친구들이 많습니다만 여전히 유감스러운 점들이 많습니다.
또, 태극권은 다른 것과 비교해서 폐단이 적고 이치를 깨달은 자들도 비교적 많기 때문에 오히려 거리낌없이 지적하였던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또한 일찍이 논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적인 비평을 이야기하자면, 제가 염려하는 것은 태극문 중에 아직 권학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 자못 많지 않을까 하는 것이고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욱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어릴 때 단학인 장삼봉 선생의 이름을 들었고 장성하여 외지로 돌아다닐 때는 각가의 여러분들을 알게 되었는데 태극권만을 익히는 자들이 많았으므로 태극권에 대한 의구심을 가진 것은 이미 오래되었었습니다.
듣기로 태극권은 장삼봉 선생이 전한 것이라 하여 저는 일찍이 삼봉을 낮게 본 적이 있었으나 후에 삼봉 선생의 전집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선생이 대도를 꿰뚫은 선진적인 인물이요, 깊은 경지에 들고 널리 요도를 얻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태극권은 절대로 선생이 전한 것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기실 긴가 아닌가 하는 것도 조금도 문제될 것이 없으며 설사 삼봉 선생의 후예가 그 요체를 얻었는가 하는 것도 논할 것이 못됩니다. 삼봉 선생의 전인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것이고 그가 도가 있었는데도 또 어째서 다른 것을 빌렸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이 전해 받은 것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태극권을 익히는 자들은 사람마다 다르고 이론도 일치하지 않아 임의로 위조하고 있음에 있어서 이겠습니까! 일찍이 삼봉 선생이 말씀하기를, ‘자신의 몸을 떠난 것은 도가 아니오, 자신의 몸에 집착하는 일도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태극권이 140, 150식으로 많은데 한 식, 한 법이라도 집착을 받지 않는 것이 있겠습니까? 이러한 자세들을 가져가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정신은 단단히 고정시켜 풀어져서는 안되기는 하지만 기실은 신경과 사지의 자유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멀리 삼봉 선생의 고명함이 이와 같음을 생각컨대, 마땅히 전함에 이와 같이 융통성이 없는 태극권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태극권의 권보의 내용을 논해보면, 단쌍중(單雙重), 불편의(不偏倚) 등의 지극히 좋은 의미들은 다만 권학의 일부분의 초보일 뿐이다. 권보를 논해보면, 태극권의 명수가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해 보기를, 일식일법이 모두 권보에서 논하고 있는 것에 합치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이미 스스로 최고의 권학이라고 여기면서 어째서 실제로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까요?
또 듣건대 태극권에는 점을 쳐서 기술을 배우는 것도 있다고 하는데 이는 더욱 세상을 황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설사 태극권의 모든 법칙이 다른 것보다 뛰어나고 솜씨 또한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정신 방면에서 그것을 말하면 역시 잘못된 것이고 기타 의심스러운 부분은 더욱 이만도 못합니다.
태극권은 다만 사람이 많고 기세가 등등하여 제멋대로 널리 선전을 하고 있으나 기실 이치에 밝은 사람이라면 공격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멸할 것이라는 것을 일찍이 알고 있습니다. 저의 말이 혹시라도 잘못되었다면, 바라건대 여러분들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질문해주시기를 바라며 만일 가르침을 받을 것이 있다면 저는 기꺼이 환영합니다.
문: 선생께서 태극권의 잘못을 비평하신 점은 인정합니다만 친구들 중에는 태극권을 익혀서 건강을 얻은 사람들도 많으니 아마도 선생께서 비평하신 것 중에는 타당하지 않은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답: 권학의 가치는 가볍고 미약한 것이 아닙니다. 권학은 바로 인생의 요구라는 것을 알아야 하니 잠시라도 일이관지(一以貫之)의 배움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장자가 말하기를, ‘기예라고 하는 것은 도에 나아가는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문화와 예술의 기초이며, 선학과 철학의 명맥입니다. 만일 다만 이러한 미미한 효과로써 권술을 대표할 수 있다면 권학을 연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태극권을 익히는 잘못이 이와 같은 데도 효과를 낼 수 있다면, 더욱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만일 운동시간에 태극권의 모든 방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임의로 체득해 나간다면 얻는 효과가 커서 태극권의 방법대로 연습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라고 저는 깊이 자신합니다.
문: 권술의 문파는 매우 많고 이론도 다른데 친구들 중에도 배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는 책을 보고서 연습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모두가 효과를 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책을 선택해야 하는지요?
답: 권학에는 이른바 무슨 일가(一家)라는 것이 없고 권의 이치도 동서고금의 구별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옳은지 잘못되었는지, 마땅한지 아닌지를 살필 뿐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보편적으로 각 문파들은 대부분 투로와 수법으로 권을 익히는 길을 삼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후인들의 위조이지 원래의 권학 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조금은 우연히 지엽적인 역학(力學)과 단편적인 기술을 알고 말한 것도 있으나 수단과 껍데기 수준을 떠나지 못하여 결국에는 쓸 데가 없습니다. 저술이라는 것도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방법은 비록 학습은 매우 쉬우나 이렇게 맹종하는 것이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종종 이름있는 선생의 지도를 받고 수 십년이 지나도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도 있으니 어찌 판각된 문장이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모든 학문은 먼저 이치를 밝히고 기초에서 공부를 체득하는 것으로부터 점점 시작하고 다시 삼가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고 여러 방면의 실험의 증명을 더한 후에야 그 기술에 나아가 연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단련 시에 거울을 보고 조작하는 것을 삼가야 하니 형태를 비슷하게 하는 데에만 빠지고 정신이 참되지 못할까 두려워해서 입니다. 하물며 책에 비추어 연습하는 자에 있어서 이겠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장님이 눈이 먼 말을 탄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만 책을 본다는 것은 각 항의 이론의 결정을 널리 채집한다는 것이지 그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것을 주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30년의 교학적 관찰에 근거해 보건대, 이 학문은 지극히 어렵기도 하고 지극히 쉽기도 하여 만일 천재적인 학생을 만나면 100일의 공을 채우지 않고서도 크게 이루어짐을 볼 수가 있으나 이는 백 명 중에 하나, 둘도 있지 않고, 재질이 총명한 자는 대부분 성실성이 부족하고 거짓되고 속이는 것이 많습니다. 그리하여 중도에서 대부분 포기해 버리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배운다는 사람들은 그 어려움이 참으로 가련함의 극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직접 보지는 않고 남의 말만을 믿으니 어찌 이름과 실제라는 두 글자가 근본적으로 동일하게 다룰 수 없는 것임을 알겠습니까? 또 세상의 권사들은 쇠털처럼 많으나 요령을 얻은 자는 기린의 뿔처럼 드물고 귀한 것입니다.
무릇 그 요령을 얻은 자들은 개성이 뚜렷하여 이름에 유혹당하지 아니하고 이익에 불려 다니지 아니하므로 당연히 거짓된 사람들과는 어울리려 하지 않으니 심하구나 선생을 얻기가 어려움이여! 설사 훌륭한 선생을 만났다 하더라도 어떻게 알아볼 것이며 혹 알아본다고 하더라도 기꺼이 청하는 곳으로 가지 않을 수도 있고 또 청함에 응한다고 하더라도 좋은 교학의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 법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배우는 자가 깨닫지 못할 수도 있으니 여러 가지 어려움은 베테랑이 아니면 또한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지금은 이전과 비교하면 배우기가 쉬운데, 과학이 발달한 시대를 만나서 권학의 원리를 이해하는 데 대해서도 도움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권학을 포괄할 수는 없으나 과학적인 층차와 국부적인 분석을 구학(求學)의 계단으로 삼는 것이 최상의 방법입니다.
저의 권학 중에도 많은 원리가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있으나 몇 년 뒤에는 혹 증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무릇 학술은 본래 끝이 없는 경지이고 영원히 이름할 수 없는 것이며 또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총괄해 보면, 여기에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권학의 정신에 과학적인 방법을 더하면 해결하는 데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문: 누차 독자들이 선생님의 이론에 대해서 부정하지는 않지만 듣고 배울 때 투로가 없어서 쉽지 않다고 느끼고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더욱 그 정도가 심하다고 들었습니다.
답: 인체의 기능은 아무리 총명한 사람이라도 일생을 통해 모두 단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정화를 버리고 찌꺼기를 익힌다는 이치가 있습니다. 또 투로는 배울수록 멀어지기가 부녀자들의 전족과도 같고 공부가 깊어질수록 더욱 어려워져서 느슨해져 풀어져 버리도록 만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배우는 사람들은 진보가 오히려 빨라서 오래 연습한 사람들을 이기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이러한 논의는 많은 사람들을 비교하여 증명된 것입니다. 후세의 이른바 무슨 식이 무슨 힘을 낸다는 말과 무슨 법이 무슨 권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크게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을 말한 사람들은 권학에 대해서 인식이 아직도 먼 것 같습니다.
문: 선생께서 말씀하신 것이 지극히 옳습니다. 기격의 망연함이 이와 같으니 모두에게 간편한 요결을 보여주시어 쉽게 효과가 나도록 하실 수 있는지요?
답: 앞에서 이미 양생의 대의를 약술하였으니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양생의 도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높고 깊은 기격을 배우고자 하면 또한 이 과정을 말미암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거나 커다란 지혜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기꺼이 이렇게는 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만일 천재라면 모든 법칙을 익혀야 할 것입니다.
기격의 법칙도 참장과 시력으로부터 배워야 하니 앞에서 이미 그 대강을 말하였습니다. 시력의 법은 매우 많은데 더구나 각 항의 힘이 몸에 얻어진 후에도 기격의 도가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는 비로소 기격의 가능성을 배우게 된 것이니, 이완에서 긴장, 긴장에서 이완을 하되 정도를 넘지 아니하고, 허에서 실로 실에서 허로 하되 중(中)을 얻는다라는 컨트롤을 장악하는 것이 또한 한가지 문제가 됩니다.
총괄해서 말하면, 선생을 얻은 후에 조예의 깊음과 얕음은 개인의 자질과 공력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는 것이니 만일 출수를 하여 시기가 이미 발하였는지 아직 발하지 아니하였는지의 요령을 얻을 수 있으려면 실제의 동작을 오래 해보아 익숙해진 사람이 아니면 얻기가 어렵습니다.
문: 권법가들이 말하는 것을 듣건대, 힘을 사용하지 않고서 어떻게 힘이 늘도록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고금의 명수 누구를 막론하고 단전의 기가 충실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답: 힘을 사용하는 것은 문외한의 논의입니다. 또 일반적으로 그럴 듯해보이는 힘을 쓰지 않는 방법을 가진 자들도 있는데 그 힘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 대체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습니다. 힘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맞으나 의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틀린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힘을 쓰면 기관이 죽고 인체가 영활하지 못하게 되어 딱딱해져서 상대방에게 틈을 주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저항의 형태를 보면, 저항하려는 의념은 상대방의 타격을 두려워하여 일어나는 것이지만 이렇게 되면 정신은 이미 타격을 받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제로도 어찌 맞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의념을 단련하지 않고 힘만을 사용하는 것은 권학에서 가장 꺼리는 것입니다.
단전의 기에 대해 논해보면, 원리와 실제 경험 및 제가 체험한 느낌으로는 이 논의는 타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배속은 장기가 있는 장소이지 결코 왕성한 기운이 머무는 곳은 아닙니다.
동력(動力)의 기능은 모두 쟁력과 탄력이 우주력과 접촉하고 호흡을 운용하고 개합을 팽팽하게 하는 작용과 정신이 혼연한 대기를 가상하는 것이니,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기공의 기가 아닙니다. 결국 아랫배로 배를 충실하게 하는 것을 단전의 기라고 여기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운용 시에는 힘은 반드시 균등하고 생동하는 상태에서 편안하게 힘을 얻어야 비로소 이치에 맞는 것입니다.
지금 배우는 자들이 이 이치를 알지 못하고 수 십년의 공을 낭비하여 도리어 영활한 심신을 기계처럼 단련하고 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문: 선생께서 이렇게 비평하신 것은 옳습니다. 다만 지속되는 결투나 장기적인 도전에서 만일 실수를 하게 되면 어찌해야 합니까?
답: 결투의 일을 제가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더구나 감히 도전의 원흉이 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바라건대 여러분이 모두 이와 같이 제창하고 토론을 한다면 권학의 앞길이 자연히 어렵지 않게 발양광대 할 것이지만, 만일 모두가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결국 스스로를 속이고 남도 속이게 됩니다.
또 개인의 승패득실은 감히 따질 것이 아닙니다. 졸렬한 의견으로 고견을 이끌어내는 격으로 온몸이 성한 곳이 없더라도 이 도가 제창된다면 저의 바람은 다할 것입니다.
문: 세인들 중 선생님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분들도 많으나 일반적으로는 크게 비난을 하는 것 같습니다.
답: 저를 알아주는 사람은 이치에 밝은 사람입니다. 저를 잘못되었다고 하는 사람은 심야에 조용히 앉아 생각을 해보면 조소와 매도가 그로부터 나온 것이기는 하나 저는 또한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권학의 진수가 다시 빛을 볼 수만 있다면 개인의 명예가 훼손된다고 할지라도 어찌 감히 안타까워 하겠습니까?
문: 선생님의 학문과 도덕은 세상이 모두 알고 있는데, 도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함축(생각이나 감정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답: 이것을 말씀하시니 매우 부끄럽습니다. 함축이라는 말은 이미 사람들에 의해 사회적인 용어가 되었습니다만 무릇 함축이라는 것은 진실로 학술과 도덕 수양의 기초입니다. 환언하면, 안은 실하되 밖은 허하고 혹은 밖은 견고하되 안은 영활하다는 것이니 바로 노자의 ‘항상 무(無)로써 그 묘함을 보고, 항상 유(有)로써 그 광대함을 본다.’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러나 모르는 사이에 일반인에게 이용되어 이미 세상을 속이는 자들의 호신부가 되었고 사회의 거짓됨도 또한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 조성되었습니다. 외부와의 교류가 있은 지 근 40년간 매양 느끼기에 사회에서 마술의 기술만은 조금도 대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아니하고 희극 또한 문외한이 맡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사이에 잘 모르는 약간의 변화는 있었겠지만요. 이른바 사람을 대하여 함축한다는 것은 상대를 보아 베풀어야 하는 것으로서 지나친 사양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학문과 도덕이라는 말은 감히 제가 감당할 수 없으나 도덕을 연구하는 것은 뛰어난 사람을 따르고자 해서입니다.
이른바 도라는 것은 바로 혼원이니 종횡으로 뒤섞어 보아도 다르지 않은 참된 이치입니다. 또 이치에 합하는가의 여부는 이치에 합하는 것은 도이고, 이치에 합하지 않는 것은 도가 아닙니다. 도는 기이한 것이 아니니, 세상의 속된 문인들이 걸핏하면 경전과 전고를 끌어대는 신기한 것은 도가 아닙니다.
더욱이 성정이 괴벽하고 미친 척하고 불노(佛老)의 학을 거짓되게 하면서 이상한 모습을 구하고 꿈에 볼 수 있다는 대도의 문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사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므로 나머지는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문: 앞에서 말씀하시기를 희극에는 아직도 적지 않은 근본을 가진 부분이 있어서 일반적인 권학과 비교하면 수준이 높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어떤 근거로 하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 비평은 아무래도 좀 잘못된 것 같습니다.
답: 희극은 본래 교육의 부족함을 보충하는 것이고 무공은 모두 권도에 근본하여 나온 것입니다. 권에는 원래 기발(起拔)이라는 단련이 있는데 시력 공부 중의 하나입니다. 무릇 기발은 정수리와 양 발 중심의 추뉴력(樞紐力)을 구하는 것으로 신체가 균정하고 방대하여 우주와 일체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발(起拔)의 단련이라고 이름한 것인데 희극에서는 기패(起覇:중국어로는 발음이 모두 qi ba로서 같다)라고 잘못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세와 이론의 의미를 살펴보면 비록 꼭 들어 맞지는 않더라도 별 차이가 없으므로 희극에도 근본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희극에서 아름다움만을 구하거나 사람들이 좋아하는 여러 자세들은 모두 위조된 것입니다. 지금 권법가들의 모든 자세는 한 자세도 그 균형을 얻은 것을 볼 수가 없고 오래되고 잘 한다는 사람들은 오히려 거짓되고 유치한 동작을 흉내내는 데다가 또 불가능한 것도 있으니 이러고서야 어찌 무도의 심오함을 엿보겠습니까?
문: 근래에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을 것 같은데요, 선생님의 이에 대해 어떻게 느끼시는 지요?
답: 근래에 각 계에서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자들이 비록 많지만 모두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어서 논하는 바가 권학과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술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모두 제가 바라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문: 선생께서 바라시는 것은 어떠한 것입니까?
답: 저는 비록 재능이 뛰어나지는 못하지만 방문자가 되도록 어려운 질문을 하고 권학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치에 합하는가, 인생과의 중요 관계 및 무도의 진정한 정신은 어디에 있는가 등을 연구하는 것을 바랍니다.
기격은 비록 말단의 기예이나 결과적으로는 이를 말미암지 않고서는 증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여러분이 비교 산수를 하기를 바랍니다. 근래에 자질구레한 일들이 많아서 내빈들을 일일이 접견하지 못하여 부끄럽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후에는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오후 1시에서 6시로 접견시간을 일단 정하기로 하였습니다.
문: 선생님의 이러한 행동을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요?
답: 저는 이미 조소와 비난을 돌아보지 않고 신기한 것을 만들지 않으며 권학의 진정한 의미를 구하고 영원히 이타주의를 지향하고 가르침을 주거나 받으러 오는 사람이 없는 것을 근심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걱정이 되는 것은 명가의 고수들이 기꺼이 와서 토론을 하지 않아 권학을 넓히는 것을 바라기가 어려울 것 같아 두렵습니다.
결론적으로 단지 바라는 것은 권학의 진전이고 사회 무도의 목표를 개선하고 쌓여 온 관습을 일신하는 것이니 기타의 것은 따질 것이 못됩니다.
문: 지난 번 신문에 담화를 발표하시어 한 때 파란을 일으키신 이래로 방문자들이 적지 않았을 텐데 그 중에는 무술가도 있었습니까?
답: 사회의 따돌림을 받지 않아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들도 많고 방문하는 사람들도 배움에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무술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단지 여지걸(廬志傑), 소택빈(邵澤?) 두 사람만이 추수로 청경(廳勁)을 하였을 뿐입니다. 기타 다른 사람은 오지 않았고 더욱이 실지의 토론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추수라고 하는 것도 단지 권도의 일부분으로서 제가 환영하는 것도 아닙니다. 북경의 전문가들 중에는 가르침을 받고자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니 참으로 뜻밖입니다. 여러분이 가르침에 이렇게 인색할 줄은 몰랐습니다. 또 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덕으로 겸양을 우선시 합니다. 그래서 제한을 두어 연장자에게 양보하고 겸손한 자에게 양보하고 기격이 약한 자에게 양보합니다.
만일 저의 말이 거짓이라고 여긴다면 일찍이 방문했던 자들에게 물어본다면 알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지걸이 처음 찾아 왔을 때 대략 추수로 기격을 겨루었을 뿐이어서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다가 계속 여러 번 찾아와 보고는 비로소 차이가 현저함을 알고는 지금은 완전히 변하여 충실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문: 무술 선배들 중에서 선생께서 마음에 품고 계신 분은 몇 분이나 있으신지요?
답: 살펴보건대, 권술의 선배들 중에서 근 100여 년 간에 동해천, 차의재, 곽운심 선생들 이외에 나머지는 모두 곁가지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땅이 넓고 사람도 많으므로 그 중에 제가 아직 모르는 사람들도 많으므로 감히 함부로 논할 수는 없습니다.
문: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양노선이라는 사람은 그 배움이 어떠합니까?
답: 양노선 선생 또한 권학의 선배로서 공부가 대단하고 현재 그를 배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다만 제가 여러 방면의 관찰에 근거해서 논해보건대, 양노선 선생은 권도의 일부분만을 얻었을 뿐이며 명 나라 때 왕종악 선생 또한 완전히 통달한 사람은 아닙니다.
왕종악 선생은 다만 악무목(악비)의 쌍추수의 일부분만을 얻어 삼권을 13식으로 바꾼 것입니다. 태극권이라고 이름한 것은 장삼봉이 전한 것이라고는 하나 실제로 고증할 방법은 없으며 또한 세인들의 견강부회일 따름입니다.
또 태극권이 140, 150식과 같이 많아진 것은 더욱 그 유래를 알 수가 없습니다. 태극권의 이론은 신체상에서는 겨우 폐단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정신상에서는 오히려 무한한 손실을 입게 되니 진실한 배움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문: 신문에 여러 차례 권학의 이론을 발표하셨는데 다른 무술가들은 그에 대해 어떤 의견을 보이고 있는 지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요?
답: 무술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명철한 사람들은 저의 권학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보수적이고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단지 듣기만 할 뿐이며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쉽게 행동에 옮기지 못합니다. 하물며 전혀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야 더 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일반적으로 권법가들은 신체를 단련한다는 것으로 구호를 삼으면서도 기격이라는 두 글자에 대해서는 일언절구 말이 없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사람들도 점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투로에 대해서는 여전히 권학의 원칙이라고 여기고 있는데 이는 실로 지극히 잘못된 것입니다. 제가 가장 주의하는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격의 방법은 투로와 비교하면 분량이 경미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무릇 양생의 도라고 하는 것은 신(神)을 모아 성(性)을 기르고, 사고가 허령함과 일체를 이루는데 달려 있으니 이른바 심심성명의 배움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초식으로 앞 뒤로 뛰어다니기만 하다가는 꿈에도 양생의 문을 보기는 어렵습니다.
양생은 실제로는 간단한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천연의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움직임을 좋아하게 되어 있으며 모든 능력 또한 이를 인하여 발휘됩니다.
예를 들어 매일 아침 신선한 공기 중에 일체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단지 전신의 관절을 구부린 듯이 다 펴지 말고 생각을 하늘에 두고 임의로 천천히 움직이면 한 편으로는 내부의 기혈의 흐름을 느낄 수가 있고 한 편으로는 신체 밖의 허령한 쟁력을 체득할 수가 있으니 이른바 신(神)이 수영을 하고 있는 듯하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리고 정신은 자연스러워서 구속을 받지 않아 대자연의 호응을 점차 인식하게 됩니다. 이것을 오래 연습하면 본래의 능력이 발휘되고 신령함이 드러나서 기격의 기초가 자연히 갖추어 지게 될 것입니다. 만일 항상 기계적인 운동에 구속되거나 곤봉이나 창을 휘두르면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이것이 무술의 영예로움이 된다는 것만 알았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한 번 보면 열흘의 노력이면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니 참으로 지극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것을 깨닫지는 못할 것입니다.
문: 선생님의 뜻은 진리를 연구하고 무술을 발양하는데 있는데도 방문자가 이렇게 적은 것은 이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답: 이 일은 해답을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제 추측으로는 우리 나라의 무술계에서 훌륭한 분들도 많기는 하지만 모자란 사람이 더욱 많아서 어떤 무술을 익혀 몇 년간 고된 훈련을 하고 나면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여기고 어떤 파의 전인이라고 자칭하고 이것을 등에 업고 사회적으로 교류를 하고 생활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러므로 그로 하여금 배운 것을 다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배우라고 한다면 상황이 매우 곤란할 뿐 아니라 생활 문제도 영향을 받게 되고 개인의 전도(前途)와 이해(利害)에도 관계가 되겠지요. 이렇게 커다란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방문자가 지극히 적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가장 불행한 자들은 결국 아무것도 모르고 그들에게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감히 장단을 논하지도 못하면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함부로 지껄여 스스로 그 단점을 가리면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그 잘못된 것을 받아 들이는 자들이 실제로 많으니 이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러한 장애물이 제거되지 않으면 우리 나라의 무술은 절대로 장족의 발전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문: 선생께서는 무술의 향상을 위하여 결심을 하시고 끈기 있게 지속하고 계시므로 무술이 큰 어려움 없이 정진할 날이 있으리라 봅니다.
답: 이 말씀은 매우 감동적이군요. 저는 스스로 저 개인의 최대의 노력을 다하며 성패와 명예를 따지지 않습니다. 유일한 목적은 어떻게 권학을 진보 시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여러분에게 감히 드리고 싶은 말씀은 기격은 본시 말기(末技)이기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기격의 고하로써 권술의 정평을 삼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종류의 연구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만일 동작 하나하나가 대체 어떠해야 적당한 것인지를 연구하고자 원하는 사람은 제가 무조건 환영합니다. 그리고 기격이나 추수를 해보고자 한다면 역시 안될 것이 없습니다. 이 범위는 굉장히 넓으므로 방문자들이 혹 많더라도 진퇴유곡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방문자가 약간의 장점만 가지고 있다면 저는 반드시 힘껏 그를 위하여 설명을 해 주겠지만 만일 전혀 취할 것이 없다면 저는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을 해도 깨닫도록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바라는 것은 방문자들이 최대한 어려운 것을 질문하여 며칠이고 서로 연구하여 권학의 진보를 도모하는 것이니 저와 여러분은 모두 권학을 발전시켜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결심을 하였으므로 만일 기술과 품덕이 모두 뛰어난 고명한 분이 계시다면 저는 미력하나마 그를 도울 것입니다.
또 바라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보잘 것 없는 재질이라서 버림을 받을 것이라고 여기지 마시고 적극적으로 가르침을 청하시어 서로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만일 권학이 이를 말미암아 진보한다면 어찌 개인의 행복이겠습니까? 천하 후세가 그 혜택을 받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기자는 왕 선생님과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였는데 시간이 이미 늦어져서 이에 서로 정중히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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